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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glish as a non-native speaker

For a few weeks, I kept myself busy prepping for the pilot English Conversational Class at Simple Steps, the non-profit organization where I volunteer as an editor. I was excited yet nervous. The program starts later this evening, and I’ve only been able to introduce myself on Slack today. As I wrote, I came to understand better where my fear was coming from. I wanted to share what I wrote with the people who read my blog.


Flashback:
I was thirteen, standing in the middle of a hallway lined with lockers. The hallway was bustling with people, but they all seemed busy going somewhere. I was lost. I did not know what to do nor where to go for my next class. No one seemed to notice me, a new Korean girl at school. Even if they did, I don’t know how much help they could have given me. I did not know what to say.

My English was so poor that the principal had placed me in seventh grade against my parents’ wishes. I could not argue with the decision. Many of the sentences I had practiced in English classes back in Korea were far from helpful. After all, can you imagine any real-life situation where a person would say, “I am a boy. You are a girl.” and such?

By the end of the semester, I was doing very well at school. The school agreed to let me skip the rest of seventh grade and moved me to eighth grade. I spent the next three years at the American Community School in Jordan and returned to Korea. There I finished school, worked as a radio producer, and studied translation at graduate 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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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ent day:
I am a translator. I have lived in the United States for about a decade. You may find it hard to believe, but even with my years of experience as a translator, I sometimes feel as terrified as you, if not more, when I speak or write in English. To this day, my thirteen-year-old self haunts me sometimes.

Some say my English is “perfect,” but I know it’s not. Speaking and writing in English (and translating English into Korean or vice versa) still require much more time and effort than I would like to admit. It doesn’t help that I’m a (recovering) perfectionist. I still kick myself (이불킥) for making mistakes. But at the same time, I realize that even native speakers are not “perfect.” The only difference is that they have the luxury of not worrying about their mistakes as much as non-native speakers. (Think of the mistakes that you make in Korean. Do you fuss over every single mistake you make?)

I am unsure what each of you expected from this class or the instructors. I know that sometimes Koreans tend to be hung up with “native speakers” making the best tutors, so I wanted to be upfront with you. Again, English is not my first language (in fact, I first learned the alphabet in French). Please bear with me. I will try my best, but I may not have all the answers on the top of my head and probably will make mistakes.

Perhaps this was one of the reasons why I might have dreaded this course. I was afraid that people would judge me and that I wasn’t “good enough” to teach and lead this class. (As you can see, I suffer from impostor syndrome as well). But like many other things in life, in language as well, you have to step out of your comfort zone and “just do it.” So, please, celebrate your mistakes because that’s how you learn. I plan to do the same. I hope we all grow from this cla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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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전 오늘

페이스북에 들어가니 8년 전 글이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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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바쁘게 휘몰아치다가갑자기 여유가 생기다 보니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개뿔.
지금 이 시간이 너무 너무 너무 너무 너무 눈물나게 좋다.
모처럼 신랑과 둘이 지내는 것도,
그냥 나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것도,
참 좋다.

늦잠 자고 일어나
아침으로 잉글리시 머핀 사이에 칠면조 햄과 오믈렛 껴서 먹고
신랑 학교 보내고
나 혼자 일 좀 하고 인터넷 서핑 좀 하고 밥 먹으며 미드 좀 보고 책도 좀 보다가
그러다 보면 신랑 와서 장도 보러 갔다가 산책도 좀 했다가.

아. 이 소소한 일들이 이렇게 귀하게 느껴지다니-

대체 나 그 동안 어떻게 버틴 거지?
12월 한 달은 불가피했다고는 하지만 사실 언제는 안 바빴던 적 있었나.
하루에도 몇 탕씩 일처리를 하거나 사람을 만나거나
왜 그렇게 달력을 빽빽하게 채우지 못해 안달이었나 싶기도 하고
힘들다 힘들다 하면서도 그렇게 일과 사람에 중독돼 있었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런 얘기를 소셜 사이트인 페이스북에 쓰는 게 아이러니하다면 하구나.)

적당히 따뜻한 나라에서 혼자 겨울잠 자고 싶다는 오랜 소망이 실현되었으니
기쁨의 눈물이 날 수밖에.

물론 이래저래 마음 복잡한 일들이 남아 있기는 하고
그런 어려운 일들이 단칼에 해결되지 않겠지만,
힘들게 얻어낸 이 값진 시간을 일단 좀 즐겨야겠다….
라고 마음 먹은 게 불과 어젠데

오늘 아침 뱃짐이 도착했다고 전화 왔다.
통관 절차 거치고 한 1~2주 후면 집으로 온다고.
15 큐빅미터, 360만원 어치 뱃짐. -_-;;
(그것도 줄인다고 줄인 거였는데)어우 야. 좀 천천히 와도 되는데. . .
어우 야. 나는 잘 버리지 못하니까 대신 좀 없어져도 나쁘지 않을 거 같은데 -_-;;;

1주일 후면 기가 막히게도 지금 하는 알바가 끝날 시점이다.
참… 그..그…래. 뱃짐 …빨…빨리 와서 조…좋은 거겠지…?
꽤 넓어 보이는 지금 우리 집을 일주일 동안만이라도 즐겨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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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난다. 2013년 12월. 나는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졸업이 될지 아니면 수료가 될지 모르는 기로에 서 있었다. 기말고사+기말과제+졸시 콤보를 물리치는 것만도 벅찼는데, 유학 첫 학기를 마치고 잠깐 한국에 왔던 남편과 뱃짐 싸고 전셋집 빼고 차 폐차하고 집에 있는 큰 짐들 중에서 시댁과 엄마, 이모네 보낼 것 보내고 그 짐들을 넣어야 할 공간들을 만들기 위해 각자 본가에 가서 정리 도와드리고 나머지 짐들 처분하고… 그렇게 휘몰아쳐서 도착했던 12월 말의 엘에이에서도 쉴 새가 없었다.

엘에이에서도 도착하자마자 짐 기숙사에 놔두고 바로 남편 동기 차로 이틀 동안 한인마트와 이케아를 돌아다니며 필요한 가구며 양념 등이며를 사고… 속전속결의 나날들이 계속되던 가운데 아마 번역도 하나 했었더랬지? 와. 새삼 다시 칭찬한다 나야. 고생했었다.

8년 후 오늘, 저 모든 건 아이가 없었으니 가능했던 거라고 새삼 깨닫는다.

여유있게 잉글리시 머핀 칠면조 어쩌고는 무슨… 매일 아침 휘몰아치며 빨리 준비하라고 채근하고 매일 밤 어서 자라고 채근하는 일상에, 일이라는 것과 일을 놓지 않겠다는 다짐을 욱여 넣어야 한다. 출근하지 않는 삶이 좋으면서도 반전업주부/프리랜서의 삶이 꼭 달갑지만은 않은 그런 일상. 어쨌든 나는 따뜻한 나라에서 겨울잠을 오래 잘 팔자도, 성격도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겠다. 그러고 보면 내가 원하는 것보다는 드문드문이긴 해도 내 커리어는 가늘고 길게 이어지고 있다. 기록을 돌아보니 알겠다.

작년 연말이 좀 지쳐서 올해는 좀 여유 있고 게으르게 시작하나 했었다. 작년에도 연초에 새로운 일을 하나 했었는데 올해도 또 다른 새로운 일을 하게 되었다. 일단 한 번 시작해보고 장기적으로는 정기적인 일이 될 수도 있겠지? 두근두근. 꼭 하고 말겠다고, 하고만 싶다고 생각했던 그대로의 일은 아니지만, 내가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일이다. 시간도 많이 부족하고 체력도 떨어지지만, 신이 난다. 그래서 좋고 감사한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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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밀리 아트 프로젝트

저녁 먹고 우리 따님이 진행한 우리 가족의 두 번째 “Family Art Project”

선생님이셨던 별이님의 말씀에 따르면 Art&math 이런 장르라고…

며칠 전 갑자기 패밀리 아트 프로젝트를 준비했다며 색종이랑 마커를 가져와서 수업을 진행하더니 그게 제법 재미있었나 보다. 오늘도 꼭 아트 프로젝트를 하겠다고 우긴다. 마지못해 알겠다 하니 신이 났다. 마루로 옮겨놓은 어린이 테이블에 의자도 색종이도 마커도 혼자 다 세팅하더니 이리로 오란다. 하나하나 자기를 따라하며 보고 배우란다.

“먼저 가운데 선을 그어. 그리고 여기도…(사실은 다 영어로 했다. 요새 부쩍 영어만 쓰려고 한다.)”

그렇게 이어진 미술 수업의 결과물을 공개합니다!

이 사진들조차 본인이 결과물을 남겨야 한다며 찍었다.

쑥쑥 자라는 우리 따님의 얼굴도 살짝 공개.

이~~

(두 번째 이도 영구치가 먼저 뒤에 나오고 젖니는 나올 생각을 안 해서 치과 가서 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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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

어제 땡쓰기빙 밤에 감사할 일이 하나 더 생겼어요. 바로… 여름에 여럿이 고생하며 번역했던 책이 드디어 나온답니다! ㅎㅎ

제목은 <앞으로 백년>… 자세한 것은 바로 요기 (교보문고 링크로)

오늘은 이렇게 홍보성 글로 끝! 🙂

(실은… 너무 피곤해서 더 쓸 힘도… 휴일 일정 빡세게 잘 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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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한 직업 유학생 부인 7

“ㅈ님은 종달새가 아닐까 싶으실 정도로 유창한 언변을 자랑하신다. 혼잣말, 전화 통화, 대화 등 말하기의 모든 영역에서 다재다능함을 보이신다. 디스크는 왜 생기는지, 병원의 시스템이 어떤지, 오는 길은 어떤지, 음식 맛이 어떤지, 자식이 몇인지, 묻지 않아도 몸소 답해주신다. 얼마나 친절하신지 눈물이 날 지경이다. 교회 봄놀이를 못 가는데도 20만원을 내셨다는 “인정 많은” ㅈ님은 그 모임의 총무로서 오늘의 궂은 날씨를 깔깔깔 웃으며 비통해하는 신공을 보이신다.”

입원 당시 페북에 연재했던 ‘501호 사람들’이라는 병실일지의 첫 화이다. ㅈ님은 내가 입원했던 501호에 내가 입원한 지 열 하루 되는 날 입실하신 분이셨다. 첫 등장부터 심상치 않으셨던 ㅈ님은 내 입원 생활의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공동생활은 쉽지 않다. 거동이 불편해질 정도로 아파서 입원한 병원의 6인실이니, 모두 신경이 어느 정도 곤두서 있어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럭저럭 잘 버티고 있었다. ㅈ님이 등장하시기 전까지는.

‘501호 사람들’에서 ㅈ님을 묘사한 부분을 보다 보니 당시 내 기분이 생생히 되살아나 웃음이 난다. 조금 옮겨 본다.

“ㅈ님의 활약상을 내 짧은 필력으로는 도무지 표현할 재간이 없다. 도대체 무엇부터 말해야 할까.

그분에 대한 웬만한 정보는 나를 포함하여 모든 병실 사람들이 3일 만에 다 알았을 것이라는 거? 나이아가라 폭포 저리 가라 쏟아지는 말끝마다 자기 자랑과 남 욕이 이어진다는 거? 자기 손님이 아니라도 누가 오면 뚫어져라 쳐다보고 참견한다는 거? 대화를 받아주는 사람이 없고 혼잣말에도 지치면 전화를, 그것도 자리에 누워 병실 전화로 일가친척과 교회 지인들에게 쫙 돌린다는 거? 새벽에도 화장실에 다녀오면서 꼭 병실 싱크대에서 손 씻는다는 거? 병실 안에서 구역질하듯 가래침을 뱉어대는 거? 젊은 사람들이 로션 바르는 거 보면서 화장품 바르는 걸 보니 안 아픈 사람 같다고 하면서 자기의 엄청난 고통을 모험이라도 되는 양 굽이굽이 풀어놓으며 디스크는 참 무서운 거라고 모두에게 일장 연설을 펼치던 거?”

…ㅈ님과 신경전을 하는 “유별난 아가씨”가 되었던 나는 결국 ㅈ님의 퇴원을 며칠 앞두고 이실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ㅈ님은 많이 외로우셨던 것 같다. 사실 그때도 모르진 않았던 것 같다. 병실 일지의 프롤로그에는 “외롭고 외로운 자길 좀 봐달라는 애달픈 외침 같은 게 아니었을까. 물론 애달픈 외침치고는 ㅈ님이 매우 과했다고 여전히 생각한다. 그 나이 먹도록 여태 외로움을 해소할 방식을 그렇게밖에 못 찾은 데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적혀 있다.

지금 생각하면, ㅈ님이 은인이다. 한 달의 긴 입원생활을 병실에서 페이스북을 통해 ㅈ님의 말과 행동을 관찰하고 고발하는(!) 걸로 하루하루를 버텼다. 그렇게 처음으로 ‘쓰고 싶어 견딜 수 없는, 소통으로서의 글쓰기’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됐다. 또 ㅈ님은 반면교사로서의 역할이 출중했다. 외로움이 지나쳐 모두를 괴롭히는 중년 여성의 전형이라고 할 만한 사람을 옆에서 보면서 외로움에 어떻게 현명하게 대처해야 하는지, 어떻게 나이들어야 하는지 진지하게 생각하는 계기도 되었다. 남이 뭐라든 상관없이 그냥 내 갈 길을 가면 그만이라고 다시 한 번 결심하기도 했다.

말은…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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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한 직업 유학생 부인 6

아니 유학생 부인 이야기라면서 대체 유학 이야기는 언제 하려고 딴 얘기만 하지? 남편 학교 얘긴 왜 안 하고, 자기 학교 얘길 하는 것 같더니… 갑자기 입원 이야기는 또 왜? 라고 생각하실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곁가지로 새어갔다는 거 인정한다. 안다. 그런데 삶이란 게 그렇지 않나. 직선으로만 갈 줄 알았는데 굽이굽이 가는 길도 있는 거다. 어쩌면 이렇게 어찌할 수 없는 사건들로 돌아가는 시간들이야말로 유학생 부인의 삶을 가장 잘 그대로 보여주는 게 아닌가 싶다. 유학생의 시간만 느리게 가는 게 아니다. 유학생의 ‘덤’이라 여겨지는 유학생 부인의 시간은 유학생 못지 않게,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느리다. 

학생의 동반자 비자로 나오는 F2 비자는 쓰레기 비자라는 농담을 종종 들었다. 사실 말이 좋아 ‘동반자’지, 정식 명칭 자체가 dependent visa(부양 가족 비자)다. dependent라는 말처럼 F1의 조건에 종속되어 발급되는 비자다. F1은 그나마 학교에서는 돈을 벌 수 있는데, F2는 아예 미국에서 영리활동을 할 수 없다는 게 가장 큰 특징이다. 과장을 좀 보태자면 그냥 F1 비자 소유자 옆에서 살아 숨쉬는 것만 허용된 비자다. (지금은 규정이 조금 달라졌다고는 하는 것 같은데, 내가 비자를 받던 당시에는 F2는 풀타임 학생이 될 수 없는 것은 물론, 수료증을 주는 정규 과정에 등록해서 공부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자립(independent) 여부는 내게 중요한 문제였다. 내가 꼭 어디까지는 오르고야 말겠다는 대단한 야망을 품은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전업 주부의 삶을 꿈꾼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우리 엄마가 전업 주부였다는 사실이다. 다른 전업주부와는 좀 다르긴 했다. 일단 학교 갔다 오면 집에 잘 없었다. 뭘 배우거나 봉사를 하거나 아니면 하다 못해 친목 생활로 늘 바빴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만 해도 엄마가 원망스러울 때도 종종 있었다. “아니, 엄마는 일을 하는 것도 아니면서 왜 학교 갔다 오면 집에 있는 날이 거의 없는 거야?”라고 볼멘 소리가 절로 나왔다. 나이를 좀 더 먹고, 철이 들고 나서부터는 그렇게 자기만의 방식으로 사회활동을 했던 엄마를 훨씬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엄마도 차라리 일을 하면 더 좋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반드시 ‘내 일’로 경제활동과 사회활동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전업 주부의 삶을 마냥 고귀하게 볼 생각도, 반대로 폄하할 생각도 없다. 직장을 갖는지 여부는 자신의 취향이나 적성, 능력에 따라 선택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현모양처가 꿈인 사람도 주변에 있다. 그 어떤 ‘바깥일’보다 살림과 육아가 훨씬 더 적성에 맞고 보람될 수도 있다. 그게 가족뿐 아니라 본인에게도 분명 더 나은 선택일 수도 있다. 


회사 다닐 때의 일이다. 생방을 앞두고 빠르게 점심을 먹고 종종 걸음으로 회사로 돌아가곤 할 때면, 세상 여유로운 사람들을 부러운 눈초리로 쳐다보게 되었다. 브런치 모임을 하는 여자들을 보면서 (아마도 전업주부인 것 같은 저들이) 직장인인 우리보다 오히려 더 ‘자아실현’을 한 쪽에 가깝다고 토로하는 직장 선배도 있었다. 

그때 마주쳤던, 보였던 사람들도 알고 보면 여의도에 흔하디 흔한 직장인이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들이 전업주부일 수도 있었을 거고, 그야말로 꽃길 한가운데를 걸어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쩌면, 그들도 시간과 돈의 자유를 누리는 언제나 장밋빛 인생이라기보다는, 아주 잠시 집안일과 육아를 잊고 한껏 멋을 부리고 단 몇 시간의 자유를 누리고 있던 전업 주부였을지도 모른다. 하필 그 순간, 회사 일에 찌들어 있던 우리 눈에 그냥 장밋빛 인생으로 보였던 것일 수도 있다. 남들이 볼 땐 ‘접속’, ‘봄날은 간다’, ‘라디오 스타’ 등에 나오는 (아, ‘라디오 스타’는 좀 아닌가 ㅎㅎ) ‘세상 멋지고 여유로운(!)’ 라디오 PD의 현실이 사실 그렇게까지 밝지만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여하튼 2012년 4월, 한 달간의 병원 생활은 내게 삶의 터닝포인트가 되었다. 지금도 또렷이 기억나는 ‘ㅈ 님을 만난 게 계기가 된 듯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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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한 직업 유학생 부인 5

T.S. 엘리엇의 황무지(The Waste Land) 는 “4월은 잔인한 달 (April is the cruelest month)”이라고 시작한다. 원작에서의 의미와는 좀 다르지만, 4월에 유독 역사적 사건들이 많은 한국에서도 많이 회자되는 말이다. “겨우내 잠들어 있던 라일락을 소생하고 욕망과 기억을 뒤섞는” 달이라는 4월.

내 생일은 4월 7일이다. 하늘 같이 의지하고 사랑했던 할머니께서 고 3 생일 이틀 전에 쓰러지셨다. 바로 중환자실에서 호흡기를 끼고 계시다가 정확히 생일 이틀 후인 9일에 돌아가셨다. 그 다음에도 4월은 내게 잔인한 달일 때가 종종 있었다.

2012년의 4월도 예외는 아니었다. 생일이자 토요일이었던 2012년 4월 7일, 아침 1교시 수업이 있었다. 서둘러 학교를 가려고 준비를 하는데… 벌써 몸이 심상치 않았다. 골반이 삐그덕거리고 마치 관절이 녹슨 꼭두각시처럼 몸이 따로 노는 느낌? 찌르르 통증이 와서 샤워하다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겨우 욕조를 의지해 몸을 일으키고 어찌어찌 나왔다. 청바지를 입는데 다리를 바지 구멍으로 꿰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다.

남편에게 학교까지 운전을 부탁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픈 것보다는 늦을까 봐 발을 동동 굴렀다. 국제관 5층까지 올라가는 계단도 겨우겨우 난간에 의지해 힘겹게 올라갔다. 다행히 9시 정각에 도착했다. 그날 교실에서 썼던 작문은 아침에 힘겹게 학교에 왔던 일을 주제로 했었기에 10년이 다 되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수업을 하나 더 듣고 밖에서 기다리던 남편과 학교 앞 맛있는 파스타 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저녁 때는 가족 모임이 있어서 고기를 먹었다. 머리고 옷이고 숯불 냄새가 진동을 했지만 너무 피곤해서 제대로 씻지 않고 잠들었다. 이 선택을 이후 얼마나 후회했는지… 요 며칠 후 쓴 일기에 “고길 먹으면 샤워를 하자.”라고 써 있다.

다음날인 일요일, 늦잠을 실컷 잤다. 컨디션이 회복됐을 줄 알았는데 웬걸.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움직일 때마다 비명이 나왔다. 좀 더 누워 있으면 괜찮겠지 싶었지만 오후가 되도록 괜찮아지지 않았다. 휴일이다 보니 병원에 가도 응급실 말고는 갈 곳이 없을 텐데…?

컴퓨터를 많이 쓰고 편집을 많이 하는 직군이라 그런지 라디오 PD 동료들 중에는 유독 근골격계 질환이 있는 사람이 많아서 근골격계 질환 관련 병원에 대해서는 많이 들어 알고 있었다. 그중 자생한방병원을 추천하신 분도 많았다. 디스크 수술은 아직 하고 싶지 않고, 어차피 일요일이니 다른 병원에 가도 응급실만 열려 있을 테니 휴일 진료가 있는 자생한방병원으로 가 보기로 했다. 전화를 걸어 진료를 예약했다. (훗날 미국에서 이렇게 신속하게 양질의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병원 시스템과 의료보험을 얼마나 그리워하게 됐는지… )

남편의 부축을 받아 차로 가는데 식은땀이 났다. 그때 우리가 타던 차는 아토스였다. 경차 중에는 그래도 넓은 축에 속한다. 중고로 물려받은 이 차를 10여년을 타면서 크게 불만은 없었지만, 이날만큼은 차 안이 어찌나 비좁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조수석을 최대한 뒤로 밀쳤는데도 몸을 말 그대로 구겨 넣어야 했다. 어느 정도 각도 이상 몸을 곧추 세우면 눈물이 찔끔 나왔다. 몸을 겨우겨우 걸치고 비스듬히 누워 발을 위로 올리고 압구정 자생한방병원 본원으로 갔다.

병원에 도착해 접수하고 기다리는 내내 의자의 네 칸을 다 차지하고 누워 있었다. 진료 시간이 다 됐는데도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진료실로 들어갈 때 내 모습은 영락없이 물의를 일으킨 재벌회장의 모습이었다. 수수하다 못해 초라한 옷차림, 헝클어진 머리에 초췌한 표정, 트레이드 마크 휠체어까지.

당시 내 상태는 보나마나 입원이 답이었다. 그러나 입원을 권하는 선생님께 나는 안 된다고 고개를 저었다.

“선생님, 제가 얼마 전에 대학원에 가서요. 학교를 가야해요. 오늘 침 맞고 약 먹고 통원치료를 하면 안 될까요?”

“환자분, 지금 보니까 몸을 일으키지도 못 하는데 학교를 가실 수 있겠어요?”

“…”

“글쎄요. 입원해 이후 경과를 봐야겠지만, 입원하고 집중치료를 해도 한 한두달은 예상됩니다.”

“…그렇게나 오래요?”

“네. 일단 바로 입원하시죠.”

진료가 끝나고는 몸이 더 움직이질 않았다. 이번에는 휠체어도 아니고 들것에 실려 입원실로 가게 됐다.

그렇게 나는 벚꽃이 아름답던 4월의 캠퍼스를 뒤로 한 채,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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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한 직업 유학생 부인 4

3월의 캠퍼스는 반짝반짝 빛났다. 무려 8년 만에 학생으로 다시 만난 대학 캠퍼스였다. 말 그대로 눈이 부셨다. 물론 이 찬란한 3월도 쉽게 얻진 않았다. 12월과 1월 내내 연말연시 특집과 녹음, 편집, 인수인계까지 일정이 빼곡했고, 급기야 목/허리 고질병이 도져서 계속 병원을 들락거렸다. 그렇게 숨 가쁘게 2월까지 회사 일을 마무리했다. 덕분에 2월 말에는 계속 차곡차곡 쌓였던 대휴와 남은 연가를 써서 친구들과 몇 년간 차곡차곡 모은 곗돈으로 커플 셋이 세부 리조트로 여행도 다녀왔다.

수업은, 각오는 했지만, 처음부터 녹록지 않았다. 대학원 2년 과정 동안 한 학기에 보통 3시간 연강으로 이뤄지는 수업이 6개, 12학점 정도다. 1학년 1학기에는 1학점인 과목이 4개라서 들어야 하는 과목이 더 많았다. 공통 필수인 주제 특강 외에도 전공 필수인 번역학 입문, 국작, 영작은 1학점 짜리였다. 선택 필수였던 일반번역 영한, 일반번역 한영을 듣고 선택 수업으로 순차통역 영한, 문학번역 한영 등의 수업을 들었다. 번역 과목에서는 늘 숙제를 해서 제출하면 선생님이 첨삭을 해주시고 피드백을 주시는 구조였다. 학생들이 제출한 과제들 중 하나를 수업 시간에 같이 보면서 함께 논평하고 관련 표현들을 배웠다.

어려웠다. 영어야 오래 멀리 해서 당연히 어려움을 예상했지만, 사실은 한국어가 더 문제였다. 모어가 한국어인 많은 사람이 간과하지만, 한국어는 만만한 언어가 아니다. 직접적인 언어로 표현되는 메시지 자체보다는 비언어적인 상황을 미루어 짐작해야 하는 일이 많은 고맥락(high-context) 언어다. (당장 나도 앞 문장에서 ‘한국어는’이라는 주어를 생략했다.) 고맥락 언어, 고맥락 사회의 예로 회식을 들어보자. 부장님이 “마음껏 시켜!”라고 하면서 짜장면을 드신다면? 명절 때 부모님이 “절대 내려올 필요 없다”라고 하신다면? 그렇다. 고맥락사회(의 언어)에서는 눈치싸움이 번번이 일어나고 행간을 잘 읽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맥락을 잘 파악했다고 끝이 아니다. 한국어의 최고봉은 아무래도 맞춤법! 틀리게 (여긴 다르게 아닙니다!) 사용하는 단어는 그렇다 치고, 자기가 쓴 글의 맞춤법 검사를 해 보면 대부분 깜짝 놀랄 거다. 방송은 물론, 신문, 심지어는 책에서도 표준 띄어쓰기 원칙이 다 지켜지지 않을 때가 많다. (나도 블로그 글은 맞춤법 검사를 안 해서 오류가 많을 것이다.)

한국어에 침투한 외래어는 또 어떤가. 소위 ‘보그체’라는 것처럼 특정 분야에서는 외래어를 과도하게 구사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문체로 자리 잡았다. 내가 학부 때 전공했던 사회과학 쪽도 대부분은 서양에서 (일본을 통해) 이식해 온 개념들이 많아서 전공책이나 관련 글에 어색한 번역투가 많았다. 그런 만큼 나는 번역투를 구분하는 게 쉽지 않았다.

번역은 각각의 언어 실력 외에도 고유한 스킬이 필요하다. 번역학 입문에서 외국어 학습과 언어학, 문학 등의 학문의 뿌리에서 뻗어 나온 번역학의 개념들을 배웠다. 화용론, 연어, 맥락 담론 등 실전에 꼭 필요하지는 않을지라도 알아두면 좋은 개념들을 다듬었다. 원문이 출발어 (사회)에서 갖는 맥락을 파악하고 그 맥락을 도착어에서 구현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번역이라는 말이다. 그러려면 원문에 충실하되 도착어와 도착어 문화도 잘 파악하고 있어야 했다.

지나친 원문 충실성도 문제였다. 번역문은 최종적으로 도착어에서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읽혀야 된다. 그러나 내가 1학년 1학기 때 했던 번역은 원문에 지나치게 충실한 경향이 있었다. 한영은 도착어인 영어 원어민이 아니라서 그런다 치지만, 모어인 한국어에서도 직독직해에 불과한 어색한 번역문을 만들기 일쑤였다. 국문 해당 장르에서 통용되는 규칙보다는 원문을 중시했기 때문에 연설문의 농담을 너무 그대로 번역하는 경우도 있었고, 한국말에서 영어 원문 표현이 너무 그대로 보이는 경우도 많았다. 직역과 의역의 줄타기. 물론 아직도 최고의 번역은 어색하지 않고 잘 읽히는 직역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 줄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어려움이 많았지만 학교생활 자체는 너무 즐거웠다. 통번역대학원 수업이 주로 있던 국제관은 엘리베이터 없는 5층인가 6층 높이의 건물이었다. 그 계단을 하루에도 몇 번씩, 싱글벙글 만면에 미소를 띠고 두 칸씩 겅중겅중 올라가는 나를 보고 동기들은 “언니, 그렇게 좋아요?”라고 물어보곤 했었다. “그럼~ 좋지~ 회사 안 가고 학교 오니까 너무~~ 좋아~~”라고 말하곤 했다. 적어도 여기서는 (회사와 달리) 나 개인에게 뭔가 차곡차곡 쌓이는 느낌이 있었기 때문이다.

과제에 남들의 배 이상의 시간을 쏟아도, 내 번역문이 난도질당해도 좋았다. 물론 마냥 좋지는 않았다. 많이 부끄러웠고 민망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잘할 수는 없는 거니까. 언어 쪽 일을 하거나 오래도록 준비한 사람들에 비해 내 실력이 모자란 건 당연했다. 운 좋게 합격한 게 어디냐. 나는 발전 가능성이 많으니까!라고 생각하기로 했지만, 늘 그렇게 의연하지는 못 했다.

그렇게 의욕을 불태웠던 3월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문제는 4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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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한 직업 유학생 부인 3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유학생 부인’이 되는 것은 오롯이 내 선택이었다. 회사를 휴직하고 통번역대학원에 진학한 것이 내 선택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때는 2011년 가을, 회사 내외의 일과 개인적인 일로 많이 지쳐 있었다. 동기가 곧 휴직하고 석사를 하게 될 것 같다는 소식을 전했다. 하나뿐인 라디오 피디 동기에게 의지하며 회사 생활을 하던 당시의 내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이야기였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했다. 곧 통번역대학원 원서 접수 시기라는 공고가 떴다. 언제나 공부를 계속할까 늘 고민했지만, 적절한 전공을 찾지 못하고 있던 내게 안성맞춤 같았다. 나중에 유학을 가기 위해서라도 영어 공부는 필요할 테니까. 내가 꼭 공부를 하지 않더라도 미국 유학 쪽으로 마음을 굳히던 남편과 계속 함께 살려면 앞으로 올 미국 생활에 도움이 될 테니까. (도움이 많이 되긴 했다.)

망설임은 많았다. 일단 내가 너무 준비가 안 된 것 같았다. 주변에 통번역대학원 시험을 오래 준비하고 들어가서도 힘들게 졸업하는 사람들을 알고 있었기에 두려움은 더 컸다. 그래도 도전하는 데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원서접수 비용을 제외하면… 일단 도전!!! 서류를 서둘러 준비해서 마감을 하루 앞두고 원서를 접수했다.

통역 쪽은 스터디를 하나도 못 했을뿐더러 매일 생방을 하면서 ‘휘발되는 말’에 염증을 느꼈던 터라 번역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대학 졸업 후 문학번역원에 원서를 넣은 적이 있었는데 서류에서 떨어졌던 기억이 났다. 이번에도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나마 요르단에 살 때 미국인 학교를 다녔던 거나 특례 시험을 볼 때 공부하던 GRE 단어가 아주 어렴풋이 기억에 남아 있어 다행이었다. 다시 단어를 공부하고 독해 문제를 풀고 지문 번역을 조금씩 해 봤다.

그렇다고 해도 내가 합격한 건 아무리 생각해도 운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다. 그렇다. 나는 시험운이 좋은 편이다. 그때 번역 전공 시험 문제는 영한 지문을 각각 요약 번역하는 것이었다. 다양한 주제를 다루던 몇 개의 문제 중에 튀니지 시위를 시작으로 시작됐던 ‘아랍의 봄’ 이야기가 나왔다. 당시 ‘경제포커스’라는 프로그램을 담당할 때라 매일 시사 평론가와 전화 연결로 관련 이야기를 많이 다루었던 터였다. 배경 지식이 있다 보니 모르는 단어나 표현은 적당히 눙치고 요약할 수 있었다. 어느 정도 글쓰기 연습이 돼 있던 것도 큰 도움이 됐다. 언론사 스터디로 논술 작문 연습은 많이 해보았었다. 또 당시 담당하던 ‘경제포커스’에서 한 꼭지였던 ‘경제키워드’는 내가 질문지 원고까지 써서 담당했었다. 그러고 보면 뭐든지 배우고 익히는 게 좋다. 뜻밖의 순간에도 실력 발휘를 할 수 있게 된다. 오죽하면 도둑질도 배우면 는다고 했겠는가.

1차 시험을 본 후, 개편을 앞두고 다른 채널 (팀) 다른 프로그램으로 발령이 났다. 경제포커스는 진행자가 개인 사정으로 하차하고 새로운 진행자와 함께 프로그램 자체 개편을 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함께 론칭하고 세팅한 지 얼마 안 되는 그 프로그램에 남고 싶었다. 확실치는 않지만 2월 말부터 휴직을 하게 될 수도 있다고 부장에게 사정을 밝혔다. 그 채널, 그 프로그램에 남게 해달라고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인사 청원을 했다. 간절한 바람이 무색하게 나는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났다.

새로운 프로그램으로 발령이 나 바쁘게 개편을 했다. 얼마 안 있어 2차 시험을 보았다. 압박 면접이었다. 튀니지, 요르단에서 살다 왔다고 돼 있는데 ‘아랍의 봄’ 씨앗을 뿌린 건 아니냐는 농담은 가볍게 넘길 수 있었다. 라디오 피디 선배 중에 통번역대학원을 나오신 분이 있었는데, 그분도 회사로 돌아갔는데 굳이 비슷한 상황의 나를 왜 뽑아야 하겠냐는 질문에는 답변하기가 좀 어려웠다. 그래도 전반적으로 나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으나마 기대를 품게 됐다.

합격 발표는 라디오 전체 체육대회 다음 날에 났다. ‘아… 정말 회사 다니기 싫다’는 마음이 더 커졌던 때였다. 뛸 듯이 기뻤다. 나도 이제 회사를 벗어날 수 있다니!

그렇게 들어간 통번역대학원을 나는 한 달만에 못 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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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in Action

Back in August, on the first day of school, I was drawn into several programs for parent volunteers. At Sia’s school, Art in Action and Project Cornerstone looked great. As a first-time kinder-parent, I was drawn to both, and I signed up for the newsletters. I didn’t know whether I would be able to commit myself to both programs, but I wanted to know more about the programs. Fast forward two months, and I am lucky to be selected as one of the two (Art) parent volunteers who are allowed on campus for Sia’s class.

Today I observed as a seasoned parent volunteer gave the class a lesson on Joan Miro, the famous Spanish artist. I was supposed to bring three things about me to introduce myself to the class. Last night, I put together the following presentation on Noteshelf (a note-taking iOS/MacOS app I am in love with). I took my iPad with me and showed it to the kids.

Hi, my name is Jiyoon, I’m Sia’s mom. I like to doodle.
I like to write, and I’m a translator. (I showed the class a recipe book called All About Croissant, which I translated from Korean to English.)
This is what Sia and I look without our masks. Do you see the pile of empty dishes? As you can see, we both love sushi.
Anyone recognize this drawing? Yes, the Very Hungry Caterpillar. These pictures were taken at the Eric Carle Museum of Picture Book Art near Boston. We went there during our summer holiday.
I volunteered to teach art, because I like art and museums.

Sia seemed so happy to see me at school. The kids were surprisingly attentive, and they seemed to have lots of fun. The parent volunteer’s lesson on Joan Miro and the scribbling that followed it were met with enthusiasm.

Part of me still says that it’s absurd that many public schools in California don’t have Art in their regular curriculum. Parents are—and should be—an integral part of their children’s education, and I’m all for volunteering. Still, I wish that art and music were taught by teachers who have the expertise and experience as part of the regular curriculum.